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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에서 영어공부를 무료로 할 수 있는 곳이 더러 있는데 대표적으로 교회이다. 

교회에서는 처음 이민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차원에서 영어 강의를 해 준다. 

그리고는 약간의 음식도 제공한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에 한하여 바이블스터디를 한다. 

바이블 스터디는 호주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현지인과 거의 일대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종교가 없다면 영어공부하는 셈치고 가까운 교회를 한번 찾아가 가보는 것이 어떨까요?

종교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수업만 받고 바이블 스터디는 안 하고 오셔도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pdf 파일을 참고하세요. 우리 동네 근처에 있는 영어 공부방을 찾아보세요.


Free English Classes in Melbourne.pdf



<2013년1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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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필사진 윤 수한 This is My Story & Prayer Request 윤 목사 간증과 기도 부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의 저의 삶은 한마디로 놀라움과 신비와 기적으로 점철된 삶이요 사역 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6.25 전쟁 이후 삶이 비참했을 때를 지나며 희망이 보이지 않던 어린 시절 미래의 꿈을 꿀 수조차 없었던 혼란과 절망기를 지나다 19세에 서울의 천호동 성결 교회의 부흥집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은 저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새로운 차원의 인생으로 도약하는 사건 이었고 그 이후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삶의 의미요 목적과 목표였고 그러다보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며 모든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유용하고 보람있게 사는 길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선포하며 저 자신이 체험한 은혜와 축복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길이요 그 길은 곧 목사가 되는 것임을 결론짖고 신학대학을 지원하게됐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한국이 너무 가난한 때요 먹고사는 일 자체가 힘든 때라 저는 헌신의 결정을 하는 순간부터 나의 지혜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과업에 부디치며 고뇌의 길 이었는데,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별로 눈에 띄지 않고 무력감 절망감이요 그러면서 저는 사도 바울이 내가약할 그때가 오히려 강하다는 고백을 상기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었고 늘 기도하는 삶 밖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형편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적으로 매달려 기도 생활을 하는데, 그때 성령께서 강력하게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가 있었고 잠시도 기도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간절함으로 깨어있는 전 시간을 하나님만바라보고 틈만 있으면 완전히 맡기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나의 삶 전체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나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계신것을 확신 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목사가 되어도 많은 공부를 하고 미국 유학을하고 실력과 영력을 함께 갖춘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결단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파고들 뿐 아니라 영어를 마스터 해야하는 일은 나의 필수 과목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만큼 영어에 총력을 기울이며 신학대학의 훈련이 출범했습니다. 그런데 서울 신학 대학 입학후 3개월 만에 소집 영장을받았습니다. 논산 훈련소로 달려가면서 나의 주머니에는 두개의 책 포켓용 영어 성경과 영어 사전 이었습니다. 군대 생활 3년을 그냥 낭비하기 보다는 집중해서 성경과 영어를 공부 할 시간은 없겠지만, 군대생활의 얽매임 속에도 때때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영어로 익히고 사전을 펴 영어 단어를 암기하며 신학교 교육과 미국 유학의 꿈을 실현 할 계기로 삼는것이 논산 훈련소를 향하는 저의 계획 이었습니다. 논산 훈련소와 영천의헌병학교를 마치고 서울 남산 기슭의 필동 수도 경비 사령부 헌병대에서군인 생활을 할때였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 마다 영어 성경과 사전 중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읽고 2 외우곤 했고, 그러던 중 한 번은필동의 수도 경비사 주위 보초를 서며 영어 성경을 꺼내어 읽으면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순찰을 돌던 헌병 장교에게 발각이 되면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경비사 52 중대 헌병대 뿐만 아니라 전 부대에 윤 일병은 신학교를 다녔고 영어를 잘하는 사병으로 유명 해 져 가던 중하루는 52 헌병 중대장이 나를 호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무슨 추가 처벌 사항이라도 있나하여 긴장하며 중대장 실로 들어 갔는데 의외로 중대장은 너무나 친절하게 나를 대하며 자기가 헌병 장교로써 미국의 헌병학교에가서 훈련을 받을 계획을 얘기하며 나를 자기의 영어 선생이 되어 달라는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때의 나의 영어실력은 바닥 이었고 단지 영어를 공부하고 싶은 열정 만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헌병대장은 내가 영어 박사라도 된것으로 취급하며 나를 영어 교사로 발탁을 하고 모든 헌병의 보직에서 나를 면제시키고 영어선생 이란 새로운 보직을 나에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혹시 중대장의 영어 실력이 나보다 나으면 어떡하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테스트를 해 보니 그는 완전 바닥 이고 나보다 훨씬 밑 자리여서 자신있게 그의 영어 선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나의 군대 보직이다 보니 나는 매일 영어를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러면서 2년 반 동안 나는 영어를 거의 완공 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계산이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초월적인 인도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나의 미국 유학생활 10년 간 Talbot Seminary탈봇 신학교, Claremont School of Theology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3개의 학위를 얻고 미국 호주 캐나다 3개 국에서 각 십 여년 씩의 이민 사역의 밑거름이 된 영어와 사역의 훈련 이었습니다.
    31개월 간의 군대 생활 중 나의 부친께서는 중풍으로 누워 계시고 가세는 완전히 기울어져 먹고 살 길이 막연한 때에 제대를 하고 귀가 했을 때나의 유일의 꿈은 신학교로 복귀하여 목사가 될 훈련을 계속 하는 것이었지만 먹고살기조차 힘들고 가난한 형편에서 그것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나는 예수를 믿고부터는 불가능한 상황이 부딛혀 올때마다 이상하게 더욱 내적으로 솓구치는 힘과 용기가 있었고 하나님을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하는 한 염려할 필요가 없고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고 때로 나의 바램과는 달리 일이 전개 될 때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고 승리케 할 것이라는 확신은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를 하는 날부터 매일 새벽마다 교회로달려가 기도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더욱더 기도를 하고 싶은 충동이 속에서끓어 오르며 매일 밤 자정이 지나 한시경 교회로 달려갑니다. 매일 밤을 기도하며 얍 복강의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을 하는데 나는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달콤한 일인지를 맛보기게 되었고 새벽 5시가 되어 새벽기도가 시작되면 참여하고 끝나면 계속 기도하다 보면 7시가 넘어 교회를 걸어 나오는데 그때보다도 하루가 상쾌하고 희망에 넘치는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까지 기도를 마치고 교회를 나오려는데 여 전도사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 나에게 닥아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를보며 문득 나는 기도의 응답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나에게 “윤 선생님, 혹시 무슨 일 자리라도 구하시는것 아니세요?” 물으신다. “ 네, 저는 저의 미래를 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위해 매일 기도 드리고있어요.” 전도사님이 말을 이으신다. “어느 명사의 집으로 부터 부탁을 받았는데 ‘혹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으세요?”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던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기도 밖에 없었고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내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신비로운 인도였습니다. 명사의 집의 초등하교 4학년 짜리아들을 가르치기 시작 하는데 너무 공부를 못하여 집안의 두통거리가 된 아들이며 가정교사를 여러번 기용하여 가르쳐보았는데 별로 다 신통치 못하여 고민하던 중 교회에서 인내력을 가지고성실히 지도할 수있는 선생님을 구하던 가정 이었습니다. 아들의 이름 이석주 였는데 나는 이 석두임을 즉시 알 수있었고 놀라웁게도 제가 맡아서가르치며 아이가 안정되고 공부를 제대로 할 수있게 만들었습니다. 정말힘든 과업이었지만 매일 적어도 대 여섯시간 이상을 기도하며 모든 일과를 수행하다보니 가정교사직 까지도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그 집의부모님들은 골치거리 아들을 잘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 준다고 나에게 약정된 봉급을 몇 배로 올려 지불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기대 이외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많은 돈을 받으면서 새로운 희망이 용솟음 쳐 오르고잘하면 집안 살림을 도와 드릴 뿐 아니라 신학교로 복학하는 일이 가능 해졌습니다.
    서울 신학 대학교 복학;
    기도 응답으로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가 마련되자 신학교 복교를 하고 공부하는데 그때처럼 믿음의 발걸음이 가볍고 즐거운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의 계산과 상상을 초월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푹 젖어 공부하며 목사가 될 준비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끝이 없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신학 대학 교과목에도 매일 많은 영어 클래스가 있었습니다. 40명의 Classmate들 모두가 영어를 하느라고 진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 수준의 영어는 나에게는 너무나 기초적인 것이라 클래스를 위해 공부를 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많은 동료 학생들을 도와주기가 너무 바뻤습니다. 모든 신학생들이 영어 공부 하느라 고투할때 나는 모든 다른 과목에 많은 시간을 집중하다보니 좋은 성적을 올릴 수가 있었고 학점이 평균 90점 이상인 학생은 수업료 면제의 특전이 있었는데 학년을 마치면서 “ 평점이 90이상이라 학비 면제”라는 판정을 받게 도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시 23편의 약속대로 나를 끊임 없이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해 주심에 감사하며 신학 훈련을 마쳐 갈 무렵 이었습니다. 이제 신학대학을 마치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할것인가? 를 생각하며 미국 유학의 꿈을 이루어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달리 여권을 받는 일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 였고 유학을 하려면 먼저 문교부에서 시행하는 외국 유학 자격시험에 합격을 해야 했습니다. 과목은 한국역사와 영어였고 미국대학에서 요구하는 TOEFL과Michigan Test 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시험을 합격 할 수가 있었고 오늘 한국 교회 사회에 너무 널리 알려지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탈봇 신학교 Talbot Seminary the Graduate School of Biola University, California에서 입학 허가서 I-20 Form을 받아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은 꿈의 실현이 아닌 새로운 단계의 테스트였고 더욱 더 치열한 공룡과의 전투였습니다. 입학허가는 받았지만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표 값이 없는데 어떻게 미국대학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합니까? 그리고 앓고 계신 부친과 어머니와 동생들을 그냥 두고 미국으로떠난다는 것은 유학이 아니라 도망으로 느껴지곤 했습니다. Dilemma after Dilemma after Dilemma그 때도 내가 할 수있는 일은 기도 뿐 이었습니다. I was hooked on Prayer. 나의 믿음 생활의 패턴은 끊임 없는 기도 그리고나의 전 의식을 기도화하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기도만 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의사인 매형과 함께 미국 Florida주에 살고 있던 누님이 비행기값을 꾸어 주어California에 도착했습니다. 정해진 입학 날자를 훨씬 지나 도착하다보니 그 다음 학기에 등록 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몇 개월 간의 여유있는 시간을 가지게 됐습니다. 유학생 비자로 입국을 했으니까 직업을 구할 수도 없고 학비 마련을 위해 할 수있던 일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Talbot신학교 안의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Campus안의 Rose Sharon Chapel이란 아름다운 기도실이 있었는데 나의 일과는 매일 기도실로의 출근 이었습니다. 몇 시간씩을 하나님과 교통하며 나의 삶을 나누는데 하루는 Talbot신학교 교무실에서 저를 만나자는 쪽지를 전달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는 Layne Founndation이란 장학기관에 저를 추천하여 장학금을 받도록주선 해주었습니다. 이제 학비걱정 없이 맘 놓고 맘껏 공부할 수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4년 여 걸려 미국 신학교의 정규 목사 코스인 Master of Divinity 학위를 끝 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미국 공부에 자신감도 생기고더욱 재미가 있어 그 다음 단계의 학위 Master of Theology 코스에 등록을하고 Layne Foundation에 장학금을 계속 지불 해 줄수있겠느냐고 문의 했더니 계속 승락이 되었습니다. 3년 더 걸려서 Talbot에서 두번 째의 학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공부하는 동안 신학생 사역자 전도자 Youth Pastor로 계속 Los Angeles에 있는 한인 교회를 봉사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공부를 계속 했습니다. 두번째 학위를 끝 내고 이번에는 미국 서부에 Harvard 로 알려진 Claremont대학 신학 부에 박사 학위 과정에 지원을했더니 합격 통지가 왔습니다. 나는 다시 Layne Foudation 재단에 계속 장학금 지원을 신청했습니다. 세번 째도 역시 기꺼이 승락을 해 주어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박사 학위를 마칠 수가있었습니다. 일전 한푼 없이 비행기표 값까지 빌려서 출발한 미국 신학대학 유학은 나에게 오병 이어의 기적이었고 한 Penny도 지불 않고 미국 대학의 10년 간의 신학 훈련과 3 개의 학위를 끝 내는 기상 천외의 사건 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 하시는 하나님 께서는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엡 3:20
    Orange County Korean Church (California) 첫 이민 교회 개척 : 세번 째 학위를 마치기 약 2년 전입니다. Youth Pastor 로 봉사하던Riverside한인 교회 목사님이 한번은 주일 예배후 나에게 닥아 오시더니“윤 전도사님, 다은 주일에는 윤 전도사님이 대 예배 설교를 해 주세요.” 갑작스런 담임 목회자인 오 인수 목사님으로 부터 부탁을 받고는 긴장하며한 주간 초 긴장 상태에서 말씀을 준비하여 대 예배에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배 후 인사들을 나누는데 여러 명의 성도들이 나에게 달려와 “전도사님 너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전도사님께서 말씀하시는것을 필기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던데 전도사님 왜 교회를 개척하지않고 이렇게 협력 사역만 하고 계시는 겁니까? 교회를 개척하세요. 저희들이 함께 동역하겠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저들의 권면을 듣고는 나는“집사님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대학에서 학위 공부하느라고 여념이 없잖아요. 더 기도 해 보겠습니다.”라고 하며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의 저는 학위 공부하느라 정신 없을 때 였지만 두 집사님의 집요한 권면과 강권은 저를 만날 때 마다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계속적인저들의 끈질긴 권면에 못 이기며 기도하던 중 혹시 하나님께서 저들을 통해 나를 개척의 길로 떠 미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기도 하던 중 저는 확신을 얻게 됐습니다. 두 집사님들을 만나 개척 결심을 나누었더니 저들은어쩔 줄을 몰라하며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이민 교회 개척의 출발점은 예배 장소확보였습니다. LA 남쪽 Disney Land로 유명한 Anaheim 지역에서 현지 교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교회 담임 목사님들을만나 한인교회 개척의 비젼을 나누며 예배 처소를 빌려 달라고 수많은 교회를 방문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의 얘기를 들은 모든 분들이 “당신 말고도 여러명의 한인 목회자들이 이미 방문하고 같은 부탁들을 하고돌아 갔다.”고 하며 교회를 빌려 주려면 자기들 교회의 제직회 당회 건축 위원회등 기관을 거쳐 상의하고 허락 결정이 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반응들 이었습니다. 너무 실망스럽고 맥 빠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굽히지 않고 예배실 확보를 위해 노력 하는데 집사님들은 만날 때 마다 무슨 진전이 있느냐고 묻는데 희망적인 대답을 줄 수없는 절망적인 상황은계속 되었습니다. 비죤은 살아 있지만 실현 가망성이 희박하게 여겨지는고뇌를 안고 나는 이번에도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짖고 계속 기도 하던 중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네가 교회를 개척하며 교회가 너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망하고 있냐?” 그때 나의 대답은 “아닙니다하나님,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면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순종하겠나이다.” 이런 대화를 하나님과 나누며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운다며 마치 주제 넘게 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 처럼 너무 걱정을 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용서하소서. 하나님만 바라고 무조건 당장 개척 전투를 벌리겠습니다.” 다짐을 하고는 두 집사님에게 통보 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우리 개척 예배를 드립시다. 교회 건물은확보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께서 인도하지 않으시겠어요? 다음 주일 정오에 Disney Land동북 쪽에 Yorba Linda라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데 큰 나무 그늘에 모여 우리 개척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두 집사님들이 너무나 멋진 생각이라고 반응을 보이고 흥분하며 개척 예배 준비에 들어 갔습니다. 각자 점심을 준비하고 오전 11시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집사님들이 자기들의 가족과 친구들 합하여 십여명이 모였습니다. 교회 건물도 없고 악기도 반주자도 없었지만 그 대신에 공원 공중을 날며혹은 주위의 나무에 앉아 노래하는 새 소리에 맞추어 찬양을 하며 하늘을지붕 삼고 온 세상을 예배 실로 하며 예배를 드릴 때의 감격은 7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너무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개척된 교회를 4년 동안 목회하는 동안 예상 외로 힘차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고 저의후임 목회자들의 신실한 봉사와 헌신으로 몇 천명 규모의 대 교회로 그리고 한인 이민 사회의 주역을 담당하는 교회로 계속 성장하고 있음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첫 이민 교회를 개척하며 교회가 계속 성장하다보니 모든 제직들이 나에게전도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으셔야 한다고 재촉을 합니다. 당시 안수 받은종이 되기에는 너무 부족한 맘으로 전도사로 계속 목회를 하려는데 성도들이 교회가 성장하려면 안수를 받으라고 계속 강권을 하여 개척한지 몇개월만에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받고 나니까 성도들이 권뭔한대로나도 의젓한 목사 신분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은 교회가 성장 발전하는데필수 요건이었던 것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척을 하고 2년후 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박사학위 를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미국 도착 십년을 지나면서 목표 하던 10년 공부를 마쳤고 개척한 교회도 성장을 하여 미국의 풍요를 만끽하며 California 주저 앉아 미국 생활을 얼마든지 향유할 수있는 조건이 다 갖주어 진 것이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역자들과 친구들이 부러워하고 얼마나 감사한 조건 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의 맘에는 미국에 그렇게 안주하기에는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힘들고 불 가능한 가운데도 나를 인도하셔서 미국 유학까지보내 주신 하나님의 한 없는은혜를 생각하면 그냥 미국에 안주하며 행복과 성공을 구가하기에는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 이었습니다. 고국에 돌아가 봉사하던가 선교지로 나아가 고 싶은 충동을 억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며 모색 하던 중 미국의 한국 크리스쳔 신문에시드니의 한 교회가 담임 목사를 구하는 광고를 보고는 흥미를 느끼며 이력서와 설교 테이프 몇 개를 보내드렸습니다. 물론 개척하여 4년간 섬겨온Orange County 한인 교회를 사임 한다는 것은 현실감이 없는 일이고 단지흥미 충족을 위해 그리고 시드니 교회의 반응을 테스트해 보는 가벼운 처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드니의 한인 장로교회는 나를 담임 목사로 선정을 하고 몇달 내로 시드니로 부임하라는 권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4년 간 혼신을 다해 개척하고 성장시킨 교회, 당시의 한인 목회는 미국 이민 초기 정착기 모든 성도들의 삶의 모든 문제가 목사의 목회영역이었고저들의 완전한 손 발 역할을 다 하던 때라 영어를 필요로 하는 모든 업무마다 쫓아 다니며 통역을 해 드리며 돕고 특히 의사를 보고 병원을 방문하는일은 가장 중요한 목회의 한 부분 이었고 이런 일들은 성도들의 영혼의 문제는 아니지만 저들과 수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친구가 되고 영적으로 저들을 양육 할 수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들 이었습니다. 년노한 부모님들은 자기의 자녀들 보다 목사와 더 친근해지고 더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는 나의 가족이 되었고 나의 형제 자매들이요 나의 자녀들이요 나의 부모처럼 섬기며 목양을 하던 중에 갑자기 제가 사임을하고 시드니로 떠난다는 소식을 교회에서 발표했을 때 온 교우가 고함을 치며 견딜수 없어하며 통곡하던 모습은 지금까지 한번도 나의 뇌리에서 희미해진 적이 없었습니다.
    한편 시드니로 이주를 준비 하면서 시드니 교회의 상황과 필요한 여러가지일들을확인하고 주선하고 있었습니다. 호주 영주권을 신청하고 부임 할교회의 현황등을 확인하는데 신문 광고에 나온 것과는 다른 내용을 접하게되었습니다. 광고에 실린 내용은 교회는 호주 장로교단 교회이며 성도수는 3백 여명 교회사택과 차량등 몇 가지 였는데 부임을 결정하고 준비하는데 확인하다 보니 엄청난 과대 광고였음을 발견했습니다 성도 3백 여명의교회가 아니라 3십 여명 이었습니다. Sydney 주변의 Petersham 의 한인교회 였는데 교회의 분란으로 담임 목사님이 3백 여 명의 성도들을 모 두 데리고 떠나고잔류 교인 30명의 교회 였습니다. 부임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목회하던교회를 계속 할까 망설이기도 하다 심각히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부름은때로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신비한 방법으로 부르시고 그런 중에도 자신의 종들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드니 교회로 부임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고난을 각오한 결정 이었고 독특한 부름에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려는대 결단이었습니다. 그런 과대 광고를 신문에 실을 정도의 영성을 확인 했지만 저들을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특수사명으로 받아들이며 시드니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여 작은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강력한 멧세지를 준비하여 선포하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는데 몇 달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주위에서 들리는 소문은 ‘윤 목사가 교회를 잘 못 선택했다. 윤 목사님은 시드니에 잘 못 오셨습니다”라는 소문만 번져 나가고 있고 “그 교회 사람들과는 윤 목사님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판결만 무성하고 있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날 나는 목회의 대 장벽에 부딛히며 모든 집사들 8부부를소집하여 목회의 현황을 논하며 어떻개 헀으면 좋겠느냐고 나의 고뇌를 털어 놓았습니다. 한참 고민하던 집사들 8가정 전체가 모두 사표를 기록하여제출하면서 아무런 직분 없이 모든 것을 저에게 맡기고 물러 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표수리 가부를 결정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제직회가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삽시간에 이 소문은 시드니 한인 사회에 번져나갔고 이어서 “그렇게 안 보였는데 윤 목사님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고그 힘든 골치거리 사람들을 모두 제직에서 퇴출 시켜 버리고 새로운 교회를 만드 셨다는 소문이 번져 나가며 곧 이어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기 시작 했습니다. 교회는 성장 무드로 진입하게 되고 30명에서 40명, 50명, 60명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던 어느날 나는 어떤 집사님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30 가정의 성도들이 시드니 연합교회에서 불만을 품고 이탈하여 새로운 교회를 창립하는데 윤 목사님께서 자기들 교회에도 매주 오후에 오셔서 설교를 하며 목회를 해 달라는 부탁 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감격하며 추가 사역의 기회를 받아 들였고 매주 두 교회를 뛰며 사역하는 분주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몇 달동안을 땀 흘리며 두 교회를 뛰다보니 두 교회모두에서 성도들이 웅성 거립니다. “ 윤 목사님이 아마 새 교회를 맡고 우리 교회를 떠나실것 같아.” 또 다른 교회 에서는 “한 목사님을 두고 두 교회가 서로 긴장 할 것이 아니라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좋지않겠어요?”하며 의견이 분분하다 두교회 모든 성도들이 통합 할것을 결정했습니다. 시드니의 한인 신문에 항상 분열만 하던 한인 교회 풍토에서 교회가 통합하는 역사적 사건 이라고 대서 특필로 보도가 되었고 교회는 계속 성장하며 100명 넘어 곧 150명 이어서 200명 그러면서 300명에 이르는 교회가 되고 나는 절망적이던 교회를 이렇게 까지 축복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목회 중 놀랍게도 성도들 중에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그들중 목회의 길로 진출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저 하는 청년들이 여러 명이 있어서 추천하여 시드니 영어권 신학대학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런데저들이 모두 호주 신학교에서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따라가지를 못하고 비명을 올리며 저를 찾아 왔습니다. 나는 저들을 위해 걱정을 하다 저들의 신학교를 방문하고교수진과 학장을 만나 대화하며 교제를 나누던 중 나의 목회 경력과 미국의 학력등을 보면서 그 신학교의 교수가 되어 동역하자는제의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좋은 사역의 기회입니까? 나는 기쁨으로 수락하고 호주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 지면서 더 많은 한인 학생들이 신학교로 몰려오고 중국과 대만 Philippine 그리고Africa학생들 까지 학교에 들끓으며 학생 수가 너무 많아 운영을 힘들어 하다가 하루는 학장님이 저를 부르더니 “윤 목사님, 당신이 별도로 신학대학을 창립하여 여러 외국 학생과 한국인들을 함께 훈련 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선교의 기회 입니까? 나는 호주Baptist College의 권면과 협조를 힘 입으며 신학대학을 세워 저들의 선교훈련을 시키다 보니 학생 수가 날마다 증가하며 200명을 넘었었고 목회와 신학훈련을 겸하며 16년을 사역하다 너무 지쳐서 쉼을 얻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것이 1996년도였습니다. 그때 저의 신학교의 학생 중 대부분이 시드니와 호주 각처에서 목회와 선교를 하고 있고 그 중에 한 학생이 새순 교회를 개척한 이 규현 목사님 이셨습니다. 북 미주로 다시 돌아가 Los Angeles근처의 Campus Crusade for Christ 미국인 신학교의박사학위 과정 책임 교수로 3년을 근무하던 중 나는 미국의 한국 신문에 캐나다 Montreal에서목회자를 찾고 있는 한인들의 광고를 보며지원 했더니 저를 선정하여 담임 목사로 초빙하여 Montreal 한인 교회를목회하면서 캐나다의 사역이 시작 되었고 교회가 성장하며 안정되면 하나님은 나를 또 새로운 곳으로 옮겨 개척을 시키셨습니다. 미국과 호주 그리고 캐나다 세나라 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어권의 나라에서 교회 목회를하며 나의 언제나의 사역 관심의 하나는 현지 영어권 사람들을 선교하는일이었습니다. 저들의 세계 한 복판에 살면서 저들에게 선교하는 일은 하나님이 한인 이민 교회에 내려주신 독특한 선교 기회 이었습니다. 여러 현지 교회와 사역자들과 친교를 나누고 지난 몇 십년 동안의 한국교회의 부흥과 새벽기도등 우리의 기도의 열정을 나누며 복음을 선포 할때마다 너무나 놀라운 반응을 목격하며 보람을 누릴 수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저 혼자 이 사명을 다 할것이 아니라 지상명령은 우리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일 뿐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엄청난약속이 곁들인 주님의 분부 아닙니까? 많은 성도를 영어권 선교사로 훈련시키는 일도 나의 주요한 사명의 한 부분 이어왔습니다. 미국 Detroit 근처의 Lansing이란 도시 주위에서 미국인 교회 목회사역을 하다 Toronto에서 한인들에게 영어와 영어성경과을 가르치고 전도및 선교훈련을 시키며 이민 정착을 도웁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가진 한인들을 도우며전도하고 있을 때 캐나다의 동해안 곧 대서양에 접한 Halifax란 도시에 정착하고 있던 부부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각 기관을 함께 방문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깨끗하게 해결 해 드리고 기도하며 용기를북돋아 주고 돌려 보냈습니다. 이들은 너무 감격을 하며 저에게 왕복 비행기 표를 보내 주며 한 일 주일 간을 Halifax (미국 동부 Boston 위쪽의 캐나다도시)로 휴가를 오라는 초청 이었습니다. 감격하며 월요일 오전에 Halifax공항에 도착 했고 저들은 Five Star 수준으로 대우를 하며 명승지를 구경 시켜주고는 저녁이 되니까 몇 명의 성도들이 모여 저들이 부탁하는대로 기도회를 인도 했습니다. 모인 너 덧 가정이 은혜를 받고는 다음 날도 지역 관광이 끝난 다음에 예배를 인도 해 달라고 하여 열심히 설교하며 축복을 해드렸습니다. 둘째날은 첫 날의 두배 정도는 모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나니까 저들 끼리 한참 웅성 거리더니 나에게 닥아와 “윤 목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내일은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 올것 같아서 교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전해 주십시요.” 나는 일 주일 동안 저들의 감사 초청 휴가를 즐기러 간 여행이 부흥집회로 둔갑을 하게 되어 이어서 목요일 금요일 저녁까지 교회에서 5일 간의 즉흥 부흥 집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집회의 마지막 날 설교를 마친 후 저들이 한참 서로 웅성 거리며떠들더니 나에게 닥아와 ‘목사님 Halifax 로 오십시요. 이곳에 교회가 필요합니다. 윤 목사님께서 담임 목사가 되시고 우리 교회를 개척 하십시다.’ 너무나 갑작 스럽고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나는 다시 하나님께서 이런방법으로 다시 나에게 교회를 개척하게 하시는 것을 확신 하면서 기쁨으로수락을 하고 Halifax의 Nova Scotia 한인 교회를 개척하게 됐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교회는 목사인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 되신주님이 인도하시고 주님의 지혜와 방법으로 주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세워지는 교회임을 확신하며 목양을 하다보니 주님이 세우시고 자라게 하시는주의 몸임을 깨달으며 감사하며 주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개척되고 성장하며 자립되고 즐겁게 목양하며 3년 쯤 됐을 무렵 입니다. 호주와 마찬가지로 이민의 나라인 캐나다는 한인들에게 최고의 인기의 나라이고 연방이민 과 곁들여 각 주별 지명 이민 프로그램이 있고 연방 프로그램보다 수월하여 많은 한인이 Nova Scotia 바로 옆의 주인 New Brunswick의 여러 도시로 흩어져 있는데 한인 교회가 없었습니다. 각 지역 마다 교회를 개척 해달라고 아우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Halifax로 전해오면서 New Brunswick의 교회 개척이 나의 Halifax교회의 Issue로 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 세워진 Halifax 교회는 어느 목사님 이라도 부임할 수 있지만 개척의고뇌를 감당 할 수 있는 인물은 윤 목사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결론과 더불어 나는 New Brunswick주의 수도 Fredericton 에서 다시개척을 했습니다. 수 많은 믿음의 벗들을 만들며 저들에게 말씀 선포하며저들의 손발이 되어 10년간을 섬겼습니다. 호주의 임시 비자로 입국하여 얼마동안 일하다 자격을 갖추어 영주권 신청을 하는 경우도많았습니다. 이 집사 가정의 경우입니다. 도착하여 저희교회 다른 가정이 경영하는 일식 집에서 2년을 Chef로 일하고 영주권을 신청 했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마지막 중요한 단계가 이민관과 영어로 인터뷰를하여 통과 해야만 합니다. 이 가정은 한국에서 명성 교회에서 훈련을 받은신실한 성도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어 준비가 제대로 않된 상태 였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알아 듣지를 못하니까 눈만 껌벅 거리다 인터뷰를 끝내고 불합격 통지를 받으면서 그들의 가정은 완전한 지옥 이었습니다. 2년동안 캐나다에 살면서 8살 10살 짜리 딸과 아들은 영어도 익히고 캐나다의삶과 학교를 너무나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민 불 합격이 되면서 캐나다를 떠나야 한다니까 온 집안이 초상집 처럼 슬픔과 절망 속을 헤메고 있었습니다. 너무 큰 충격에 아이들은 잠을 못자고 밥을 먹지도 못하고 얼굴과 몸에 온 갖 종기가 돋고 비명을 올리고, 자기들은 한국에 돌아 갈수 없으니까 엄마 아빠하고 5살 짜리 동생만 데리고 가라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가정의 다섯 식구가 담임 목사인 나의 사택을 찾아왔습니다. 사택 문을 열어 주니까 온 가족이 들어 서자마자 통곡이 터졌습니다. 수 십년을 목회하면서 처음 겪는 성도의 비극의 현장 이었습니다. 통곡만 하고 있는 저들과 함께 울 수 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함께 울다가 정신을 가담으며 저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기도해 드리는데, 저들을 살리는 길은 영어 먹통인 저들 부부를 이민 인터뷰를통과 시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은 전무한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고등학교 출신 그리고 아내는 중학교 출신 의 저 학력인 저들의 슬픔을 안고 한참함께 위로하고 기도 하다 나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장 시간 이민 목회를 하며 설교 할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오지 않았느냐? 네가 영어 훈련을 시켜 재 인터뷰를 통과 시켜주면 되는거아니냐?” 너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저들을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하다들려 온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이었습니다. 나는 다짐하며 “하나님, 알겠습니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저 가정을 구출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도우시 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저들을 안심 시키고 영어 훈련을 시켜 합격하도록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들의 반응은 “목사님, 그건 가능한이 일이 아니어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저들의 대답은 맞는 말 이었고 불가능한 과업 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정복이 불가능한 에베레스트에 부딛혔지만 저들을 그냥 한국으로 돌아 보내기에는 저들이 너무 비참하고 불쌍하여 견딜 수가 없는 마음 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상기하며 저들에게도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한 가정을 살리기 위한 인천 상륙 작전을 벌렸습니다. 캐나다는 년 중 반 이상이 겨울 나라이며마침 1월 달 이었으니까 가장 추운 때요, 일년에 서 너번은 눈 사태로 길이막혀버려 주일 예배를 취소해야 하는 계절 이었습니다. 나는 저들에게 매일 새벽 6시 이전에 영어 훈련 심방을 결정하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5시 전에 일어나 자동차가 빠져 나갈 수 있도록한 시간 수 백번 삽질을 하며 눈과의 전쟁을 매일 치르면서 매일 출동하여저들 구출 작업을 시작 했습니다. 저들 가정을 살리는 유일의 영어 작전 이었습니다. 한 달 간 매일 새벽 찾아가 신병 훈련식 영어 훈련을 시키며 하루종일 듣고 외울 숙제를 주고 제가 친히 저들 수준에 맞추어 문장들을 녹음하여 수백 번씩 듣고 외우게하고 하루 종일 공부 할 숙제를 매일 주며 한 달을 계속 하니까 저들이 조금 자신을 가지기도하고 제 정신이 들면서 어찌매일 새벽 목사님을 이렇게 고생을 시켜 드릴 수가 있습니까. 내일 부터는같은 시간에 우리가 목사님 댁으로 찾아 뵙겠다고 하여 목사관으로 훈련장소가 바뀌었습니다. 그 후 4-5개월 저들을 살리기 위한 나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점진적으로 저들의 영어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고 있는 것을즉시 할 수있었고 재 인터뷰 몇 주전 부터는 인터뷰 예상 문제들을 작성하여 외우고 알아들을 수있게하고, 이어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완벽하게 준비하여 완전히 외우게 하고, 조금 머뭇거리게 될때 공간을 메꾸어 인터뷰가 자연스럽게 흐를게 할 표현 까지 연습을 시키고, 이어서 여러차례 내가이민관이 되어 모의 인터뷰를 계속하며 저들을 준비 시켰습니다. 드디어재 인터뷰 날자가 닥아 왔습니다. 저들을 주 이민 성 인터뷰 장으로 들여보내고 근처의 Coffee Shop에서 기다리는데 그때처럼 내가 긴장하고 초조하며 간절히 저들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던 일은 지금도 나의 머릿 속에 생생합니다. 한 시간 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 저들 다섯 식구의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 보는데, 놀랍게도 저들의 얼굴은 햇빛보다 더 밝은 미소들을 띄우며 즐겁게 떠들며 걷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저들이 재 인터뷰에 합격한것을 직감 할 수 있었습니다. 저들과 대화하며 인터뷰 진행사항을 얘기하라고 했더니 이민관의 모든 질문이 내가 준비 시켜준 그대로물었고 준비한 답변을 그대로 하니까 이민관이 너무 기뻐하며 합격을 알리고 용기를 주고 축복하며 인터뷰를 끝내 주더랍니다. 처음 인터뷰에 빵점을 맞은 저들이 2차 인터뷰에는 만점을 얻고 이어서 캐나다와 미국 국경 지대에 있는 이민 국에가서 영주권을 받았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죽어가던아이들은 즉시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캐나다의 풍요한 모든 혜택을 누리며 행복하게 믿음으로 걸어가며 승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민 목회 사역 중최대로 마음을 기울이며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고 승리한 사건 이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럼 마음과 사명감을 주시고일을 성사 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며 나의 목회의 전투는 끊임없는 지구전이 될것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다 보니 너무 긴 얘기가된것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목회 사역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며 벌리는 전투입니다. 목회를 할 때마다 너무 많은 정겨운 믿음의 형제자매와 친구들을 만들어 왔고 영혼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저의 사역의 열쇄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을 만들어 드리다 보면 그 안에 화목과 하나됨이 싹트고 교회는 생명력을 얻고 서로 사랑하며 힘차게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저의 목회의 큰 특전 이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말씀이요 멧세지에 있습니다. 본인이 미국에서 목회를 시작 하기전 TIME지에 Protestant Preaching 이란 기사가 실리고 교회의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는 좋은 기사 였습니다. 주요 내용 몇가지는 목사가 강단에서 1분의 설교를 위해 한 시간은 소모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공식 이었었고 30 분 짜리 멧세지를 준비 하려면 30시간을 준비해야 한다는 이론 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교회가 담임 목사의 자리가 비어 목회자를 구할 때 목회자에게서 무엇을 찾으시겠느냐는 질문에 수많은 교회 사람들의 대답은 첫째 설교, 둘째 설교, 셌째 설교라는 기사는한시도 나의 뇌리에서 떠난 일이 없고 내 사역의 지침이 되어 왔습니다. 목회는 목회자가 팔방 미인이 되기까지 모든것을 다 잘 해야 하지만 다른 일들 아무리 잘 해도 분명하고 강력한 그리고 철저히 성경을 파헤치는 설교없이는 사역은 큰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미국 호주 캐나다 세나라에서의 몇 십년간의 사역의 경험과 개발된 은사는 나를 내 인생과 사역의Climax 최고봉에 와 있음을 확신하며 나의 삶과 사역의 어느 때 보다도 정력적으로 일하며 근간 Sydney로 돌아 온 후 부터는 Aborigine 이라고 불려지는 호주 원주 민 선교, 200 개 이상의 종족으로 구성 돼 있는 Australia 현대 선교의 전략 샹 최고의 요새인 호주의 타민족 선교와 선교의 비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어 실력이 부족하고 선교 전략이 불실한 한인 교회 성도와 지도자들을 선교 전략과 영어훈련를 한데 묶어 선교 전략상 절실히 요구돼는 선교 훈련 아카데미를 열고 포괄적인 사역을 열어 가고 있으며 특별히 기도로 후원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러면서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로 결속시키며 살아 움직이는 지역 사회로 일으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항상넘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Sydney에서 윤 수한 목사 드림
    200 Glenrock Parade, Koolewong, NSW 2256, Australia

    44/28 jeffcott Street, West Melbourne, Victoria 3003, Australia 0467659283 www.lfkpc.ca/sermon/70098 런던교회 초청설고 www.youtube.com/shypastor 사역 동영상들, whysoohan@hotmail.com “융단 폭격 선교 영어” 윤 수한 지음 ; 영어의 전 분야를 기초 부터 높은 수준까지 융단 폭격 식으로 다룬 교재로 http://cafe.daum.net/NBchurch 로 들어가 “영어 공부” 를 클릭하면 240 Lesson, 그리고 각 과 마다 수십개의 문장을 쉽게 이해하고 익힐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영어 교재입니다. 저자의 반 세기 동안의 영어권 이민 목회의 산물이며 무료 교재로 선교의 비젼을 갖인 사람이면 반드시 검토해야할 과제일 것입니다. 수천 개의 예문과 번역과 원어민 녹음이 곁들여 누구라도 가장 효과적으로 영어를 완공하고 선교 대열에 진군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교재입니다.



    2019.04.0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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