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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민을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어떤이는 한국이 싫어서 가는 거 아니냐? 배신자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이 싫어서라기 보다는 보다 나은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서 간다는 것이다. 말장난인가?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 한국사람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을 가는 사람은 교민들이나 한국에 남은 분이나 모두 경계대상이다. 호주에 살면서 한국을 욕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부모를 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민의 전조
2006년 가을에 신한은행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에게 뉴질랜드, 호주를 여행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물론 황마님은 그전에 시드니를 여행하고 왔던 터라 호주에서의 생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이참에 나를 데리고 가서 돌아 보여주고서는 뭔가를 결심하게 만드려는 불순한(?) 의도로 이 여행을 기획한 거 같다. 나는 그래서 처음으로 뉴질랜드와 호주를 돌게 되었는데 신혼여행 때 로마를 가본 것 이후로 해외여행이었다. 내가 짧게 본 뉴질랜드/호주의 생활은 평화롭고 여유로왔다. 그 당시 나의 삶이란 토요일, 일요일에도 출근하고 평일에는 새벽에 나가서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그런 삶이었다. 5시에 퇴근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세상 사는 것이 모두가 나처럼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점점 심해지는 교육열
애들이 초등학교에 가면서 교육비의 상승이 두드러졌다. 미취학 에서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선에서 끝났던 것이 이제는 예체능 과목은 물론이고 학습학원까지 다녀야 하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땅을 파봤자 흙밖에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에서는 인간들끼리의 치열한 경쟁속에서 먹거리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길이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이렇게 부모와 아이가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또 졸업을 했다고 치더라도 취직이 안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막대한 교육비로 모든 비용을 탕감한 후 나의 노후 생활은 무엇으로 준비할 수 있는가? 혹시 또 만일에 사고로 부모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무도 우리 아이들을 책임져 주지 않으며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호주는 그나마 국가가 그 일정 부분을 맡아주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면도 있다.
나의 노후 대책은
내 나이 이제 40이 가까워져 오니 미래가 걱정이다. 예전에는 뭐든지 맡겨만 주면 잘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더 편한 것, 좀 더 쉬운 것만 찾게 된다. 나이가 있다보니 고객 상대로 해야하는데 고객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술도 적당히 먹어줘야 하고 가무에도 재주가 있어야 하는데 난 늘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은 존재이다. 회식 뒷풀이 때는 아무도 날 찾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나의 경쟁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전조이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민국에서 실업자가 되면 누구 한명 나에게 십원한장도 보태주지 않는다. 실업이 바로 신불로 연결되는 것이다.
선택 그리고 도전
앞으로 10년은 한국에서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바야흐로 이제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하고 제 2의 직업을 찾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어차피 새롭게 시작할 것이라면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난 자위하게 된다. 내가 한국을 떠나면 청년실업자 2명은 구제될 수 있다고. 어색한 합리화이지만 나는 애국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5년간 밤낮과 휴일을 반납하고 일했던 티맥스소프트를 2008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
하지만 난 아직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조국을 사랑한다. 6000년이나 되는 고조선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만주대륙을 달리던 조상들의 기상과 백두산의 숭엄한 정기를 이어 받아 호주에서 새로운 성공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내가 못 하면 나의 아들들이 이어서 할 것이다. 우리가 반도에 갖혀 있었던 것은 최근 몇백년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더 많은 한국인들이 반도를 떠나 세계로 나아가 새로운 거대한 물결을 만들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멜번초이 무단전재,퍼가기,재배포금지>
이민의 전조
2006년 가을에 신한은행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에게 뉴질랜드, 호주를 여행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물론 황마님은 그전에 시드니를 여행하고 왔던 터라 호주에서의 생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이참에 나를 데리고 가서 돌아 보여주고서는 뭔가를 결심하게 만드려는 불순한(?) 의도로 이 여행을 기획한 거 같다. 나는 그래서 처음으로 뉴질랜드와 호주를 돌게 되었는데 신혼여행 때 로마를 가본 것 이후로 해외여행이었다. 내가 짧게 본 뉴질랜드/호주의 생활은 평화롭고 여유로왔다. 그 당시 나의 삶이란 토요일, 일요일에도 출근하고 평일에는 새벽에 나가서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그런 삶이었다. 5시에 퇴근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세상 사는 것이 모두가 나처럼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점점 심해지는 교육열
애들이 초등학교에 가면서 교육비의 상승이 두드러졌다. 미취학 에서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선에서 끝났던 것이 이제는 예체능 과목은 물론이고 학습학원까지 다녀야 하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땅을 파봤자 흙밖에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에서는 인간들끼리의 치열한 경쟁속에서 먹거리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길이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이렇게 부모와 아이가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또 졸업을 했다고 치더라도 취직이 안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막대한 교육비로 모든 비용을 탕감한 후 나의 노후 생활은 무엇으로 준비할 수 있는가? 혹시 또 만일에 사고로 부모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무도 우리 아이들을 책임져 주지 않으며 올바른 사회구성원으로 자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호주는 그나마 국가가 그 일정 부분을 맡아주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면도 있다.
나의 노후 대책은
내 나이 이제 40이 가까워져 오니 미래가 걱정이다. 예전에는 뭐든지 맡겨만 주면 잘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더 편한 것, 좀 더 쉬운 것만 찾게 된다. 나이가 있다보니 고객 상대로 해야하는데 고객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술도 적당히 먹어줘야 하고 가무에도 재주가 있어야 하는데 난 늘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은 존재이다. 회식 뒷풀이 때는 아무도 날 찾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나의 경쟁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전조이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민국에서 실업자가 되면 누구 한명 나에게 십원한장도 보태주지 않는다. 실업이 바로 신불로 연결되는 것이다.
선택 그리고 도전
앞으로 10년은 한국에서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바야흐로 이제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하고 제 2의 직업을 찾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어차피 새롭게 시작할 것이라면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난 자위하게 된다. 내가 한국을 떠나면 청년실업자 2명은 구제될 수 있다고. 어색한 합리화이지만 나는 애국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5년간 밤낮과 휴일을 반납하고 일했던 티맥스소프트를 2008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
하지만 난 아직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조국을 사랑한다. 6000년이나 되는 고조선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만주대륙을 달리던 조상들의 기상과 백두산의 숭엄한 정기를 이어 받아 호주에서 새로운 성공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내가 못 하면 나의 아들들이 이어서 할 것이다. 우리가 반도에 갖혀 있었던 것은 최근 몇백년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더 많은 한국인들이 반도를 떠나 세계로 나아가 새로운 거대한 물결을 만들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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