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BS에서 명가(名家) 라는 사극이 시작되었다. 나는 평소 경주 최부자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남의 이야기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텔레비젼 사극을 통하여 최진립 장군이 나와 같은 본관이며 심지어 같은 사성공파 직계조상이라는 것에 뿌듯해 하게 되었다.
나는 다시 12대째를 이어온 경주 최부자집의 말로에 대하여 궁금해졌고 나는 인터넷을 찾아보고 저으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대째 만석군 최준(1884~1970)을 끝으로 경주 최부자집은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9번째 진사이며 12대째 만석군이신 최준선생은 일제시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기부하였고 그 일로 일경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해방된 후 국가 재건을 위하여 지역유지들과 뜻을 모아서 대구대학교를 설립(1947년)하여 남은 전재산을 모두 학교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주) 현재의 대구대학교가 아님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1961년) 대학을 통폐합한다고 압박을 넣는 통에 학교의 재정이 악화되어 운영이 어렵게 되자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에게 학교의 운영을 맡기게 되었다.(1964년) 학교를 넘김에 있어 이병철로 부터 한푼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팔았다고 볼 수 없다. 이병철 회장은 야심차게 자금을 추가 투자하여 학교를 정상화시키고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던 중 이른바 사카린밀수사건(1966년)으로 박정희에게 약점을 잡혀서 박정희에게 학교를 상납하게 되었다. 마침 부실한 청구대학을 넘겨 받아서 고심하던 박정희는 이병철에게서 대구대학을 빼앗아 청구대학에 합병시켜(1967년) 몸집을 불린 뒤 영남대학교로 개명하여 실질적으로 소유하게 된다.(1968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신 경주 최진사 최준선생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 것인지 짐작된다. 일본 장교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던 박정희에게 남은 전재산을 고스란히 넘겨준 꼴이 되었으니 말이다. 결국 이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떠나셨다.(1970년) 박정희는 최진사가 기부한 경주 최가의 소중한 땅을 마음대로 팔아서 현재의 영남대학교를 설립하고 교주(校主)로 자처하고 있다고 한다.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 300년 종가가 이러한 역사로 인하여 현재 영남대학교의 소유이며, 그래서 박근혜의 소유가 된 내력이다. 박근혜가 선친이 아끼시던 영남대학교를 되찾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한다면 이완용의 후손이 이완용의 땅을 되찾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학교의 역사를 모르는 영남대학교 교직원 중에는 박정희가 세운 학교인 줄로만 알고 그 딸인 박근혜를 주인으로 생각하는 분이 일부 있을 법도 하다. 또한 엄연한 학교 부지안에 왠 오래된 무덤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겠거니와 학교 땅안에 불법(?)으로 버티고 있는 무덤을 이장해 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조상의 선산과 종가까지 학교에 기부하여 땅투기의 밑천을 제공하신 최준선생을 원망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분들에게는 경주 최씨종가의 관리비용을 왜 학교에서 부담해야 하는 지 이해가 안 갈 것이며 차라리 이 고택을 팔아서 엿이나 사먹고 싶을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제기럴...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원광대학교 조용헌 교수)
한국에서 명문가는 전통고택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집을 명문가로 판단하여
역사성과 도덕성, 인물을 중심으로 15곳을 선정하여 쓴 책으로,
해남의 고산 윤선도 고택, 거창 강동마을의 동계(정온)고택, 안국동 8번지 윤보선 고택(한국인명사전에 50여명 등재), 남원 몽심재(죽산박씨 고택, 원불교 성직자 40여명 배출), 진도의 운림산방(소치 허련 이래 화가 30여명 배출),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 한국에서 명실상부한 장원 강릉 선교장 등과 함께 경주 최 부잣집을 조선 선비정신(노블레스 오블리제, 특권층의 솔선수범)표본으로 소개하고 있다.
경주 최 부잣집
경주 교동 69번지,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경주 최 부짓집 또는 최 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 부잣집터는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는데, 요석궁은 원효대사와 독수공방하던 요석공주의 로맨스가 어린 곳으로, 둘 사이에 해동성자 설총이 태어난 곳이다.
최 부잣집의 여섯 가지 원칙(전통)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다섯째,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를 집약하면 積善之家 必有餘慶(좋은 일 많이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
❖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진사란 조선시대 초시 합격자로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자격요건이다. 벼슬이란 權不十年이요 멸문지화의 지름길...
❖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만석은 쌀 1만 가마니의 재산(20억원), 만석 재산이면 돈이 돈을 벌어들이는 상황이지만, 만석 이상은 소작료를 낮추어 사회에 환원
❖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년 소득 쌀 3천석 중 1천석은 가용으로 쓰고, 1천석은 과객 접대, 1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데 썼다. 과객이 많이 머물 때는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흉년이야말로 부자들이 논밭을 헐값에 사들여 재산을 늘릴 수 있지만, 이는 양반이 할 처신이 아니며, 헐값에 논밭을 넘긴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이 부메랑 되어 돌아온다.
❖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광 열쇠는 안방마님이 가지고, 집안 살림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과객에게는 후했지만, 집안 내부 살림은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사방 100리는 동해안, 영천, 울산, 포항까지의 영역으로, 주변에 굶어 죽고 있는데 만석 재산이 무엇이냐, 이는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다.
육연(六然)이라고 하는 수신(修身)의 가훈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對人靄然) :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有事敢然) :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 뜻을 얻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최 부잣집의 12대 마지막 만석 부자 문파 최준(1884~1970)은,
일제 강점기를 살다 간 마지막 부자로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며 상해 임시정부 김구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독립투사 백산 안희제와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상해에 계속 군자금을 보내다 보니 부도가 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빚은 당시 쌀 3만석에 해당하는 130만원으로 사장인 문파가 지게 되었다. 만석꾼에서 빚쟁이로 전락했지만, 얼마 후 뜻밖에도 식산은행 총재 아리가라(有賀光豊)가 거액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한다.
최준-최식-최염(방배동 빌라 거주)-최성길(판사)
“만석은 조부님(최준) 대에 끝났다, 조부께서는 인촌과 친했으며, 인촌의 영향을 받아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해방 직후 현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학 설립에 여유 재산을 모두 희사했고, 6․25 후에는 경주 집을 포함한 나머지 재산으로 경주 계림학숙을 설립하였으나 곧 대구대학과 합쳤다.
조부께서 대구대학을 운영하다가 5․16 후 운영이 어려울 때 이병철이 학교를 운영해 보겠다며 교동 사랑채로 찾아 왔을 때, 조부님이 이병철에게 ‘자네 고려대학의 교주(校主)가 누구인지 아는가?’ 하고 물으니 이병철이 ‘인촌 선생 아닙니까.’ 고 대답하였다.
이에 ‘아니다. 보성학원의 설립자는 이용익 대감이고, 2대 교주는 손병희 선생이다. 손병희 선생이 운영하다가 인촌에게 학교를 맡겨서 오늘날의 고려대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네도 사심 없이 잘 운영하면 후대에 가서는 인촌처럼 교주 대접을 받을 것이다.’ 라고 당부하며 이병철에게 학교를 넘겼으며, 대가는 일절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병철은 1966년 한비사건(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학교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시 넘어가 현재의 영남대학이 생긴 것이다.
조국광복 후 미래를 위해 후손을 기르는 것이 만석꾼의 재산을 영원히 보존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400년간 이어온 농토와 선산을 비롯하여 살고 있는 집까지 전 재산을 육영사업에 희사한 최준은 "해방이 되었으니 일본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놓음)했으니 도둑이 들어올 수도 없으므로 대문을 활짝 열어두라"는 말을 남기고 1970 세상을 떠났다.
차종손 최성길은 사법고시에 무려 10번을 낙방고하고 11번째 합격해서 현재 판사로 재직 중으로, 진사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가훈을 어겼다. 교동 집은 현재 영남대학 재단 소유이며, 맏며느리에게만 전수하는 佳酒인 ‘교촌법주’를 상품화 한 것이 ‘경주법주’다. 1
참고글
1. http://e-fund.kr/546
2. 江山萬古主
3. http://blog.daum.net/kkk3ys/7892138
4. http://blog.daum.net/tnddlsekd/12267813
| 나와 어떤 관계인가
- 사법고시는 5급 공무원으로 과거에서 급제에 해당 됨. 진사는 지방직 공무원(9급) 정도에 해당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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