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기/한국여행지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멜번초이 2013. 10. 6.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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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진흥왕 때 삼국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어 한반도 전체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였다. 진흥왕은 재위 12년(551)에 백제와 손잡고 당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죽령(竹嶺) 이북의 한강 상류로 진격하여 이곳에 10여개의 군(郡)을 설치하였고, 여세를 몰아 14년(553)에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광주(廣州)지방을 그 치소(治所)로 삼으면서부터 신라는 현재의 서울 지역을 북방 경영의 군사적 거점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진흥왕은 16년(555) 10월 북한산을 순행하여 강역(疆域)을 확정하였고, 11월에는 돌아오는 길에 통과한 여러 고을에 1년간의 세금을 면제해 주는 한편 특별사면을 베풀어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조처했는데, 북한산순수비는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산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 이거 국사책에서 봤던 이야기지만 어디에 있는 지 몰랐다. 북한산에 몇번 올라가기도 했지만 순수비가 있는 곳은 들르지 못 했기에 보지를 못했다. 이번에 드디어 진흥왕 순수비를 보고 같이 서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에 진흥왕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땅을 넓히고 여기에다가 이런 기념비를 세웠다. 북한산은 신라땅이다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진흥왕 순수비 옆에 서려면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몇명의 사람들이 이 바위에 앉아 보았을까? 이 거북바위에 앉아 있으면 생각보다는 아찔하다. 왜냐면 발 아래가 천길 낭떠러지 이기 때문이다. 



진흥왕 순수비는 비봉의 꼭대기에 있다. 이 높은 곳까지 바윗돌을 헬리콥터도 없던 그 시절에는 어떻게 들고 올라왔을까? 혼자 올라오기도 이렇게 힘든 것을. 아마도  그 때는 도사들이 많았던 시대인 만큼 도력으로 돌을 날렸을 것이라고 믿어 본다. 순수비 앞에 섰을 때는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다. 엇. 귀중한 순수비를 막 만지고 해도 되는건가요? 네.   (이 비석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박물관에 있음) 


재미있는 것은 이 순수비가 건립 후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글자가 없는 이름없는 돌비석으로 버림받아 오다가 19세기 초 금석학에 관심이 많았던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승가사에 들렀다가 이곳에 찾아와 이끼로 뒤덮인 비면을 닦아내고 판독함으로써 진흥왕순수비임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한다. 역시 대단한 김정희 입니다. 


<2013년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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